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덴마크-노르웨이 왕국 (문단 편집) ===== 페데르 슈마케르의 두각과 몰락 ===== 본래부터 크리스티안 5세는 [[덴마크인]]에게 인기가 많았고 귀족들을 견제하기 위해서 평민들을 중용하던 부왕 프레데리크 3세의 정책을 계승하였기 때문에 즉위 이후에 더욱 큰 인기를 끌 수 있었다. 크리스티안 5세 시절에 두각을 나타낸 대표적인 평민은 프레데리크 3세의 국왕법을 기초했던 페데르 슈마케르였다. 그는 AD 1670년 크리스티안 5세에 의해 그리펜펠트 백작으로 임명받았고 AD 1674년에는 상급 자문관에 임명받으면서 사실상 총리 역할을 수행했다. 다만 페데르 슈마케르가 대외 정책을 총괄하면서 AD 1672년 5월에 발발한 프랑스-네덜란드 전쟁(AD 1672년 ~ AD 1678년)의 참전 여부를 두고 크리스티안 5세와 마찰을 빚었다. 크리스티안 5세는 이번 기회에 할아버지 크리스티안 4세와 아버지 프레데리크 3세가 고전을 면치 못했던 스웨덴과의 전쟁을 재개하기를 원했다. 그리고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왕가의 신성 로마황제 레오폴트 5세와 브란덴부르크 선제후 겸 프로이센 공작 프리드리히 빌헬름이 네덜란드를 지원하자 스웨덴의 어린 왕 칼 11세를 대신하고 있던 섭정단이 프랑스의 부추김을 받아 브란덴부르크 군의 배후를 공격했으나 AD 1675년 6월 페르벨린 전투에서 오히려 패배하였다. 이에 고무된 크리스티안 5세가 스웨덴을 상대로 선전포고를 하려고 했으나 페데르 슈마케르가 반대하고 나선 것이다. 결국 크리스티안 5세의 총애를 잃은 페데르 슈마케르는 AD 1676년 부정부패 혐의로 실각하고 사형까지 언도받았으나 나중에 종신형으로 감형되었고 노르웨이의 감옥에서 남은 여생을 쓸쓸이 보내야 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